#손뜨개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던 오빠가 내려와 어린 동생들을 건사해야만 했어요. 중왕리 바다를 터전 삼아 살던 우리는 변변한 땅도 배 한 척도 없었어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오빠는 가축도 키우고 바다에 나가 갯지렁이를 잡는 등 몸으로 부딪치며 저하고 쌍둥이 남동생 뒷바라지를 했지요. 저는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처음에는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4년제 미술대학에 가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죠. 그래서 오빠를 조르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철이 없었죠. 그래서 지금도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늘 고맙게 생각해요. 졸업할 때까지 고등학교 미술반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결국에는 제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어쩌면 포기라는 말 자체가 저한테는 사치였어요. 쌍둥이 남동생들이 천안북일고등학교와 천안고등학교에 각각 다니고 있었거든요. 동생들 학비에 생활비만으로도 오빠 혼자 힘으로는....(침묵) 그만큼 가난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나요? 어려서 그림도 좋아 했지만 수예를 잘 놓았어요. 학교에서 대회가 있을 때마다 항상 최고상을 놓치지 않았죠. 어쩌면 그때부터 실과 저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마침 부평에서 뜨개방을 크게 하는 친척 언니가 저의 딱한 사정을 알고 부평에 올라와서 수예점 일을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망설이지도 않고 얼른 옷 가방과 자취 도구를 챙겨 부평행 버스에 몸을 실었죠. 사실은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잠시나마 행복한 꿈을 꾸었거든요. 1층에는 수예점이 있고 2층에 입시 미술학원, 그리고 4층은 숙소가 있었어요. 그래서 어쩌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 다닐 수 있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었지요.
#꿈은 이루어졌나요? 낮에는 돈을 벌고 저녁엔 학원에 다니면서 입시 준비를 해서 혼자 힘으로 대학을 가려고 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어요. 4층에 숙소가 있어 매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미술학원 문만 바라보다가 서산에 다시 내려올 때까지 문 한번 두드려보지 못했어요.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까 아침 여덟 시 반에 문 열어서 일곱 시 반까지 가게 일을 하면 다리가 퉁퉁 부어 서 있기조차 힘들었어요. 그리고는 인천에서 대학 다니는 동생들 챙기러 제물포에 가야 했거든요. 밥 챙겨주고 반찬 만들고 잠시 새우잠을 자고는 새벽 전철을 타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4년을 보냈어요. 혼자 울기도 많이 했죠. 일이 고되고 힘들기도 했지만 제 또래에 대학생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침묵) 그때는 복순이란 내 자신의 이름도 돌아가신 아버지도 참 원망스러웠죠.
#언제 서산으로 귀향을 결심 했나요? 결혼하면서요. 그때 당시 기술직으로 일하는 친구들이 오십만원을 받았어요. 저는 30만 원을 받았지요. 왜냐면 먹고 자고 언니네서 해결을 했잖아요. 한달 용돈은 3만원 정도 썼어요. 그것도 동생들 반찬값하고 교통비 외에는 써본 적이 없는것 같아요. 그러면 매월 삼십만원 정도는 저금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죠. 그러던 어느 날 급하게 엄마한테 전화가 걸려왔어요. 오빠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서 병원에 있다고요. 오빠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문안 갔다가 우연히 오빠 친구를 병원에서 만났어요. 첫눈에 반한 건 아니지만 몇 번 만나면서 편안한 인상도 좋았고 성실해 보이더라고요. (웃음) 지금 돌이켜 보면 어린 나이에 객지 생활하면서 고향도 그립고 엄마도 보고 싶고 빨리 정착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결혼하고 내려와서 애 둘 낳을 때까지 남편과 함께 세탁소를 7년 운영했어요. 원래는 남편이 양복점을 했었는데 기성복이 나오면서 점점 수요가 줄고 그래서 세탁업으로 전환하게 되었어요.
#손뜨개점을 운영하게 된 동기가 있다면? 세탁소가 나하고 너무 안 맞는 거예요. 신랑하고 같이 한 공간에서 일을 하다보니 자꾸 부딫치고 싸우는 일도 잦아지더라고요. 부평에서 배운 뜨개질 기술과 경험이 있으니까 가게만 열면 자신은 있었거든요.
#자본금은 있었나요? 그때는 보증금 낼 돈도 없었지요. 세탁소 마치고 나면 아이를 업고 밤마다 이 골목 저 골목 왔다 갔다 하면서 권리금 없는 가게를 찾으러 다녔어요. 쌍둥이 동생들이 대학 졸업하고 각각 은행과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었어요. 동생들 도움으로 대출 조금 받고 부평 언니가 실을 공짜로 다 내려줬어요. 평생 잊을 수가 없죠. 세상에는 진짜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대표님에게 손뜨개방은? 한마디로 이 뜨개실은 생명의 동아줄이나 다름없어요. 지금 20년 넘게 하면서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손뜨개와의 인연으로 생활도 하고 아이들도 키우고 어쨌든 저의 인생하고 같이 가는 질기고도 고마운 ‘실’이지요. 손님들도 너무너무 잘해주시고 그 덕분에 저도 치유 받으며 살았어요. 형형색색의 ‘실’은 때로는 엉키기도 하고 어느 날 술술 풀리기도 하고 또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우리 속세에서 ‘인연’ 같은 것 아니겠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실’처럼 살아온 것 같아요.
#손뜨개방의 또 다른 역할이 있다면? 어쩌면 사랑방 같은 느낌? 같이 있다가 밥때 되면 밥도 나누어 먹고, 특별한 반찬은 없지만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시골 반찬 있잖아요. 게꾹지, 짠지, 된장, 풋고추, 새우젓 넣고 지진 호박찌게 그런거?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오잖아요. 특히 남편 직장 따라 도시에서 온 젊은 새댁들은 처음에 서산에 적응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아요. 친구도 없고 외롭고, 시골텃세?! 그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친 언니 같이 챙겨주고 그러면서 사람들과 정도 붙이고, 실은 짜고 스트레스는 풀고, 뭐 그런 공간이 되기도 하죠. 학부모들은 애들 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기다려주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그래서 뜨개가 좋다고 얘기하신 분도 많아요. 그리고 이런 말 해도 되나?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오고 말수가 없는 분들도 다른 집 시댁, 남편 흉보는?! (웃음) 아줌마들 모이면 단골 수다 있잖아요? 옆에서 떠는 거 듣다 보면 어느새 기분이 풀려 너무 밝게 웃다가 돌아가는 걸 보면 저도 마음이 참 흐뭇해져요.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지금 너무 만족해요. 어린 시절 미술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거,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어릴 적 꿈이 가슴 한구석에 작은 불씨처럼 남아있었어요. 그래서 생활이 어려울 때도 붓을 놓치 않고 미술강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며 한국화를 배웠죠. 스님한테도 가서 배운 적도 있어요. 지금은 원도심에 좋은 작가들도 많이 입주해 저는 신이 났죠. 미협 활동도 같이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웃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오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게 현실을 살아가는 데는 더 잘된 지도 몰라요. 제가 돈을 벌기에는 그림보다는 뜨개질이 훨씬 편해요.
#이름과 성품이 잘 어울리는데? 윤복순!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처음에는 개명도 하려고 했어요. 옛날에는 이름이 정말 싫었거든요. 사람들이 이름을 물어볼 때마다 창피하기도 하고 해서 머뭇거릴 때가 많았어요. 한번은 뜨개방에 오면서 만난 친구가 있는데 올 때마다 이름을 자꾸 물어보는 거예요. 다른 핑계를 대며 대답을 안 해줬죠. 근데 어느 날 “설마 복순이는 아니지?” 그렇게 묻는데 순간 심쿵! 잘못하다 들킨 것처럼 얼굴이 빨개지면서 한편 웃음도 나오고....(웃음) 아버지가 복(福) 받으며 순(順)하게 살라고 지어주신 이름이 지금은 너무 소중하고 아버지한테 고맙고 또 미안하고... 지금 살아계셨으면 이 말씀 꼭 드렸을 거예요.
#원도심 골목에 장점이 있다면? 전 보다는 주변도 밝아지고 좋은 분들도 많이 오고 너무 좋아졌어요. 그림산책 갤러리가 들어오고 주변에 예쁜 공방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요. 특히 미술을 하는 작가들이 주변에 있어서 너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그림도 보고 서로 소통하며 웃음이 넘치는 이 골목이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맛’를 더해 준다고나 할까요. 오랫동안 큰 욕심 없이 건강하게 서로 마주 보며 오늘처럼 내일도 살아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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