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집에 수건이 없어” 딸의 전화를 끊고 정신을 차려보니 시간은 자정을 향해간다. 부랴부랴 집에 들어서자 현관 앞에서 남편이 하는 말 “너 뭐하는 여자야” 이런? 미안하기는커녕 너무 어이가 없다. 나도 모르게 “나! 미대 나온 여자야!!”
흥! 칫! 뽕이다. “아무리 네가 뭐라 해봐라. 내가 그림을 그만두나” 난 오늘도 다음 전시를 위해 붓을 잡는다.
충남 서산 출생 서양화가 김은주(45) 작가의 전시 팜플렛 작가 노트에서 보듯이 한국 사회에서 중년 여성작가의 가정생활과 작업환경을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이다. 그녀의 작품 휴식, fashion meeting, 여행, my favorite 등에서 보듯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여과 없이 솔직하게 그려내며 현대사회에서 중년 주부들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잊고 있던 나를 그림을 통해 돌아보게 한다”고 말하는 김은주 작가를 그림산책 갤러리에서 만났다.
# 원도심에 갤러리를 만든 특별한 이유라도? 관아문길은 저의 추억이 많이 묻어있는 곳이죠. 저희 어머니도 90년대에는 이곳에서 의류매장을 오랫동안 하셨죠. 전에는 서산의 명동이라 불릴 정도로 화려했던 상가들이 텅 비어 씁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스럽기도 해요. 스산의 따뜻한 레트로 감성이 묻어있잖아요? (웃음)잠자는 도시에 작가들의 감성을 불어넣어 아름다운 도시로 다시 깨어난다면 멋진 일 아닐까요?
# 입주는 언제 했나요? 오래전 병원 건물로 쓰이던 이곳은 작업실로 각자 쓰기에 안성맞춤이었죠. 작년부터 이곳 원도심에는 작가들이 하나, 둘 입주하기 시작했어요. 옛날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선. 후배 그리고 퇴임하신 선생님, 어느새 훌쩍 나이가 들어 이렇게 다시 마주하니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에요. 7명의 작가들이 모여 함께 소통하며 작업하는 감성도 즐겁지만 좋은 작품들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싶어 한동안 망설이다 갤러리 간판을 걸게 되었죠. 작품전시를 통해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편안하게 수다 떠는 힐링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 앞으로 운영은 어떻게? 큰 미술관도 필요하지만 아담하고 작은 갤러리도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타 도시를 여행하면서 도심에 있는 작은 갤러리, 소극장 이런 게 제일 부러웠거든요. 아이를 키우면서 더욱 절실했어요. 엄마들은 아이들이 자랄 때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고 싶어 하거든요. 특히 서산은 부족한 전시 공간으로 작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죠. 그런 작가들을 위해 매달 기획전시와 초대전을 열고 있어요. 아주 저렴한 금액으로 대관도 할 예정이에요. 얼마 전 정태궁 작가 초대전시가 성황리에 마쳤고 다음주부터 한달 동안 조성찬 작가의 드로잉을 포함해서 30여 점 전시가 열릴 예정이에요.
# 미술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미술 시간에 풍경수채화 수업이 있었어요. 잘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그렸고, 재밌게 그려서 제출했죠. 근데 선생님께서 미술학원에 다니던 잘 그린 친구의 작품과 본인의 작품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성실하고 개성 있게 그린 저의 작품을 칭찬해 주셨어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때 얻은 자신감으로 그림에 관심을 같게 되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대학 입학을 위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어요.
# 작가로서 앞으로 계획하는 삶이 있다면? 두 아이의 엄마. 아내, 며느리로 살아가는 삶은 정말 만만하지 않아요. 맞벌이 하는 엄마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저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래의 엄마들은 비슷한 환경에 같은 감정이지 않을까 싶어요. 한국 사회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림을 빼놓고 저의 모습은 상상하기 싫고요. 그림은 유일하게 ‘김은주’를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언어이기도 하고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이기도 해요. 앞으로 좋은 전시기획도 하고 작품도 열심히 하고 싶어요. 물론 요리도 잘할 거고요. (웃음)
# 그림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어떤 분들은 가끔 저에게 페미니스트 아니냐고 묻는 분들도 있어요. 딱 잘라 아니라고는 말 못 해요. 저도 결혼을 하고 난 뒤에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이 생겼고 공감 한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피해의식이 있거나 남 녀 평등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르고 생물학적이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각자 역할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저의 작업은 주로 중년 여성들의 평범한 일상들을 작업의 소재로 쓰고 있는데 예를 들면 어지러진 식탁, 소파의 걸쳐진 옷, 빨래통 등 ....솔직히 말하면 우리 집 풍경이에요. (웃음) 집안 구석 구석의 가감 없는 풍경을 통해 아직은 우리 주변에서 당연시 여기는 사회의 통념이나 여성을 보는 시선이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어쩌면 알면서도 혹은 놓치고 가는 부분들이 있다면 사회든 가정이든 약자에게 서로 배려하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 나에게 그림이란? 삶 그 자체라고나 할까요. 그냥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일과를 마치면 피곤할 법도 하지만 작업실에 나오는 시간이 기다려져요. 캔버스에 붓질을 할 때 오롯이 ‘김은주’로 존재하기 때문이죠. 김은주 작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한 예술가?’ 는 아니지만 가정에서는 두 아이의 엄마와 아내로, 사회에서는 서양화 작가로 당당하게 살아왔다. 작업실에 빼곡히 쌓여있는 침묵하는 그림을 통해서 그녀는 세상에 대고 뭐라고 외치고 싶었을가? 나! 미대 나온 여자야!! 그렇다고 극단적 페미니즘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예술이라는 영역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그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어쩌면 그녀 작업의 매력이고 그녀의 삶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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